「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최진영

 p.57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에 머물러 있는 원도가, 여관 주인의 "아저씨 이상한 짓 하면 안 돼"라는 말을 최근에 들어본 가장 따뜻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원도가, 산 아버지의 오래전 말을 속으로 따라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져라.


p.64

메워진 구멍은 고통을 견딘 대가다. 메워지지 않고 계속 썩어 들어가 더 깊은 구멍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러므로, 상처라기보다 통로다. 나를 뚫고 지나가기에 나를 소외시키는, 나는 절대 볼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길. 흔해 빠진 인간에 불과한 원도는, 기억도 학습도 젬병인 원도는, 자기를 뚫어버린 그것을 기억하기보다, 몸에 난 구멍을 기억했다. 

뭔가가 나를 뚫고 지나갔어.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확 지나가버렸는데 여기 구멍이 있어. 여기로 자꾸 아픈 바람이 불어와 엄마. 여기 있어야 할 게 없어 엄마. 내 몸에 이게, 이게 대체 뭐야 엄마.

원도가 운다. 무서워서 운다. 


p.76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음은 자기 자신처럼, 아무리 생각하고 탐구하고 친해지려 노력해도 절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에. 알 수 없는 그것을 철저히 홀로 겪어야 하므로. 


p.77

선택을 너무 오래 미루면 결국 누구도 원치 않는 최악의 선택이 나를 선택하기 마련이지. 

후회해봤자 소용없어. 시간을 되돌릴 순 없잖아.

착각하지 마. 우리는 선택하지 않아. 선택당하지.


p.86

타협과 기만과 합리화 없는 완전무결한 만족이 과연 가능한가.

인간의 마음에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것의 중심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어떤 공간이 있는데,

아주 사소한, 빗방울 하나보다도 작은 공간이 있는데,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딱딱한 맨틀 같은 것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어서 그 무엇도 그 중심에 닿을 수 없고, 닿을 수 없으니 채울 수도 없고,

그래서 그 공간은 텅 비어있을 수밖에 없는데, 

닿을 수도 채울 수도 볼 수도 없지만 그곳에 있기에 분명 느껴지는 그곳은 결국 저주이고, 

신이 인간을 완벽하게 사랑하기보다, 사랑하면서도 증오하여 만든 마음의 구멍이고...


p.89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생명.

완성하기도 전에 썩어가는 음식.

진심이란,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p.115

선택이라는 말조차 없는 곳, 아니, 모든 말이 지워지는 곳에 아니다 진짜 자유가 있다고 선택 없는 자유는 없다 원도는 생각했다.


p.116

열여섯 살의 원도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굳이 되어야 한다면 세 살이 되고 싶었다.

세 살의 어느 날에서 멈추고 싶었다.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죽고 싶어서였다.

꿈꿔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해서였다.


p.176

'왜'라는 질문을 잃어버리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질문을 제거해버리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p.183

나에게 그것을 줘.

내가 바라는 그것.

언제나 원하는 그것.

처음의 그것.

그러므로 실패는 항상 예견되었다.

원도의 인생에 유일한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실패일 것이다.

사랑의 실패.

어떤 아이는, 배고프다며 울다가도 엄마가 밥을 차려주면 숟가락을 집어 던지며 더 크게 운다.

원도가 그런 아이였다.

엄마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니야.

그런 아이였다.

엄마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야.


p.195

엄마는 왜 그렇게 커? 나도 커? 엄마만큼 커? 엄마도 작았어? 근데 왜 컸어? 꼭 커야 돼? 

왜? 왜 그래야 돼?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안아줘.


p.240

살아야 할 이유라면 무수히 많다. 살아내는 일 분 일 초, 모든 행위와 생각이 결국 다 사는 이유다. 어떤 것은 이유고 어떤 것은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드문드문 살 수 없다.

살고 싶었다. 사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모른 채로도 살았고, 살아 있으므로, 사는 데까지는 살고 싶었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은 죽고 싶지 않다는 열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p.242

그리고 지금 여기, 당신.

지금까지 원도의 기억을 쫓아온 당신도 한 번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이런 인물이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


p.243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기억해야만 한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곳곳의 위험과 불행 틈에서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왔는지를.


p.244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댓글